공동체 언론의 다양성, 민주주의와 르네상스의 시작
공동체 언론의 다양성, 민주주의와 르네상스의 시작
  • 황민호
  • 승인 2019.01.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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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호(옥천신문 제작국장)

국가와 지역공동체
 
국가는 기실 작은 풀뿌리 공동체의 연합이다.

마을이, 지역으로 또한 광역으로 엮이어지면서 또 크게 묶이면서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본시 느슨하고 수평으로 평등하게 연결되었던 것이 국가의 중심도시가 생겨나고 수도로 명명하면서 모든 것이 재편됐다. ‘효율’과 ‘성장’을 이유로 ‘수평’은 ‘수직’으로 바뀌었고 평등은 위계가 생기면서 위-아래, 중심-주변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관계는 왜곡되고 비틀어졌으며 지역 주민으로의 정체성은 옅어지고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었다. ‘애향’보다는 ‘애국’이 ‘세계 속으로’를 강조하는 글로벌리즘 시대에 더 멋들어지고 소구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실제 삶이 이행되고 실행되는 뿌리 공동체의 근간은 심하게 흔들렸고 여전히 흔들거리고 있다. 중심으로의 탈주와 주변에서의 절망이 변주되며 ‘탈각’과 ‘탈락’이 혼재된 채 삶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생태지형은 물론 그에 기반을 둔 토착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상실된 채 중심도시 개발과 문화의 복제품만이 양산되고 있다. 도시의 철지난 유행이, 이미 폐기처분된 개발정책이 문화와 발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중소도시로, 또 농촌으로 그렇게 스며들고 있다. 지금까지의 미디어는 이를 가속화시키는 주범이자 공범이었다.

저널리즘으로 그 부패와 부조리를 지적하며 속도를 더디게 하고 성찰하게 했지만, 그 패러다임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지 못하고 있다. 성장과 발전이 그러했듯이 투쟁과 저항도 지역의 자원을 동원하는 형태로 같이 맞부딪쳐왔다. 그런 방식도 한편에서는 필요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방식과 대안이 요구된다.

권력과 자본의 물꼬는 중심도시에서 근원하여 지역, 마을 고샅 고샅까지 흘러내고 있다. 이것은 힘과 돈으로 수평적인 지역공동체의 근간을 똑같이 흔들었다. 힘과 돈은 중심도시 핵심권력의 줄과 망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은 지역에서 ‘작은 우두머리 체제’를 그렇게 구축했다.

지역 공동체의 공공성은 그렇게 위협받고 있다. 이미 민주주의로 등치된 대의민주주의가, 승자독식의 선거제도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가운데, 공동체의 공공성과 다양성은 망가지고 있다. 공동체에서 공공성은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자칫 힘의 논리로 사적인 관계망으로 결집되어 강자 중심으로 엮어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이다. 공공의 자원을 함께 공평하게 나눈다는 의미의 공공성은 힘과 돈의 논리에서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공공성을 지켜야 할 선출된 권력들이 이의 책임을 방기하고 자본과 결탁하여 나라와 지역사회를 어지럽힌다면 사실 답이 없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 이와 더불어 학문과 종교의 결탁 등이 맞물리기 시작하면 수많은 약자들은 약육강식의 정글보다 더한 곳에 놓여있는 것과 진배없다.

공동체 미디어의 필요성

그런 가운데 마지막 보루가 바로 언론이다. 서울에서 국가 체제를 감시하는 언론도 중하지만, 지역이라고 해서 권력과 자본이 없지 않고 학문과 종교가 없지 않다. 원래 나쁜 것은 빨리 배운다고 위에서 썩는 것을 아래에서도 보고 배우고 아래에서 그렇게 해먹던 이들이 위로 올라가 또 그렇게 해먹는다. 더욱이 국가에 대한 관심은 텔레비전, 뉴미디어 등으로 여기저기 조명하는 곳이 많아 높아지고 있으나 변방의 지역은 사실 소외되어 있다. 이런 백척간두의 환경에서 말과 글을 바로잡아 민의 말을 전하는 공공 미디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동체 미디어, 즉 커뮤니티 저널리즘은 두 가지 차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큰 틀에서 국가권력에 복속되어 획일적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지역의 생태, 문화 다양성을 지키는 초석이자, 보루이다. 앞서 말했듯이 생태적 다양성과 그에 기반을 둔 토착문화가 다 다를진대 서울의 발달된 미디어는 지역을 식민지화하는데-원하던 원치 않던-앞장서고 있고 훌륭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 자체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서울을 끊임없이 동경하며 스스로를 배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종용한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 미디어는 지역의 문화 다양성을 지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이를 알리는 매체로서 큰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공공성이 빠진 공동체는 위험하다. 익명성이 아니라 관계성은 자칫하면 서로를 지지하는 망이 아니라 서로를 옥죄게 하는 그물이 될 수 있다. 그물을 잡아당기는 그 힘이 더구나 돈과 힘을 가진 자본과 권력의 결탁이라면 그것은 더 문제가 커진다. 그야말로 아수라 지옥이 되는 셈이다. 공동체와 공공성은 함께 가야 한다. 공공성은 썩어가는 바다의 소금 같은 존재이다. 연결된 관계망의 힘을 공공성의 지향으로 트는 물꼬를 바로 공동체 미디어가 할 수 있다. 일단 정보를 모두에게 알리고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며 지역의 권력과 자본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하는 구실로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구실을 해주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부실한 관계망을 다시 깁고 관심이 덜한 관계망에 주목하며 소외되는 이 없이 평등한 끈이 유지되도록 하는 구실도 더불어 한다.

공공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론장인데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모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열린 공론장으로 공동체 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론화한다는 것은 그들끼리 그들만의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좌지우지하는 숨 막힐 지경인 지역사회에 숨통을 내는 일이다. 닫혀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물웅덩이의 물꼬를 터서 흐르게 하는 일이다. 물이 흘러내면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후미진 곳으로 고샅고샅 샅샅이 적시어주는 것이다.

공동체 언론은 그런 역할이다. 잔뜩 오염된 웅덩이에 짱돌을 툭툭 던지며 용존산소량을 늘이는 일을 하거나 급기야는 닫힌 둑을 허물어 물을 흐르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언론은 주체가 아니라 매개다

언론은 매개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주체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항상 객체일 수밖에 없다. 반면 끌어내어주고 견인해주는 중한 구실을 한다. 진실을 밝혀내어 진심을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다다르는 길에 그렇게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언론은 마음을 동하게 하여 움직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 분노하고 증오하게 하여 무엇보다 생각하게 하여 온 몸뚱아리를 움직거리게 하며 행동하고 실천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지만 추동의 힘을 내재할 뿐이지 그 자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한계를 명확히 지니고 있다. 언론은 공론화하는 촉매구실을 할뿐이다. 진짜 공론장은 대신하고 대변하는 매개 없이 직접 얼굴과 말을 섞어내며 공동의 이야기들을 모아내는 것이다.

언론이 주인행세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게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공론장이 약하고 물러터진 곳에서는 언론이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며 주인 구실을 한다.  언론은 공론의 반영이어야 하지만, 대부분 생활권역 단위의 면대면 공론장이 굉장히 취약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때 언론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대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인 것 마냥, 직선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 것인 것 마냥 환호하던 시대는 명확하게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대변하였던 관료조직과 선거, 그리고 언론이라는 체계는 그 자체로 권력이 되기 십상이다. 언론도 스스로 권력이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견제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독자위원회, 지면평가위원회, 노동조합, 윤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서 민에 의해 제어될 수 있도록,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라는 최고 권력기관을 정점으로 재편되어 수직 위계의 체계가 건사되고 있는 가운데 언론은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국가라는 체제 권력과 시장이라는 자본 권력을 비판하거나 추종하는 제 3지대 권력으로 자임한다. 그것은 어찌됐든 국가라는 체계를 더 공고히 하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언론은 체제 권력과 자본 권력을 제대로 비판하고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언론을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의미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 언론이 창이라면 '거울'의 의미를 지닌 언론이 있다.

공동체 미디어는 이 아닌 거울

그것은 지역과 생활권역에 똬리 틀면서 정말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받아들으려 하는 지역 언론이나 마을신문, 공동체라디오, 공동체 TV, 팟캐스트, 유튜브 등 각종 소셜미디어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을 둔다. 서울의 언론이 체계를 중심으로 나름의 위치를 만들었다면 지역, 마을의 미디어는 생활세계에 기반 둔 것이 크다. 언론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면 공동체 미디어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바깥소식을 알려주는 창의 역할이 있다면 안의 소식을 알려주는 거울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 창과 거울이 함께 있어야 지역과 세상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 미디어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지역 언론이나 마을신문 또한 작은 체계의 권력, 자치단체장이나 시장 권력에 부화뇌동하며 얼마든지 썩어낼 수 있고 주민들을 대상화하며 하나의 사업으로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기반이 지역과 마을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다. 더 이상 익명으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서 공론의 실마리를 잡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언론이 권력, 관료집단, 기업, 시민사회단체, 전문가그룹 등 상층단위의 의견을 모아 공론인양 내보내는 구실을 한다면 지역의 언론은 직접 주민들의 말을 듣는 기회가 더 많고 주민들이 매체에 실리는 빈도가 훨씬 많다. 쉬이 말하자면 서울의 언론은 대의, 간접 민주주의를 한다면 지역공동체 미디어는 직접 민주주의를 하는 방식인 셈이다. 진정한 의미의 원시적인 공론장의 촉매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지역공동체 미디어라 할 수 있다.

옥천만 해도 5만여 명, 2만여 가구에 다다른다. 그런 지역에서 4천여 부의 구독자가 존재하고 다섯 가구당 한 가구씩 지역신문을 자발적으로 본다는 것은 참 유의미한 일이다. 여섯 명쯤 되는 직업 기자들이 각 지역과 마을 고샅을 쏘다니며 공적인 이슈들을 끊임없이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훌륭하고 분명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자산이다. 그런 작은 지역에 매주 대판 24면 이상의 소식들을 보도 자료 없이 끄집어낸다는 것은 지역의 분명한 힘이다. 그것은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는 또 결이 다른 것이다. 눈에 띠게 보이지 않지만 전체적인 지역사회를 성숙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주 끊임없이 삶터 가까운 곳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전국적인 이슈도 지역화, 마을화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추동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언론의 다양성, 민주주의와 르네상스의 시작

언론은 더 낮아지고 다양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면서 공론화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옥천군내 인구 1천명 밖에 되지 않는 옥천에서 가장 작은 면인 안남면에 배바우 신문이 만들어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비록 창간호밖에 내지 못했지만 옥천사람들+란 잡지의 시도도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한다. 소출력 라디오도 인터넷 방송도 케이블 티비도, 각종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지역에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미디어가 헌신과 희생이 아닌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지역사회가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뉴스만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의 콘텐츠를 생산해내어 지역의 정치, 문화를 바꿀 것이다. 척박한 지역 토양에 단비를 뿌리는 구실을 할 것이다. 지역의 단절된 관계가 다양한 미디어로 인해 연결되고 부패된 권력과 자본이 비로소 제어될 것이다. 공공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면서 지역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뉴스 등이 모아져서 컨텐츠가 되고, 컨텐츠가 엮어져서 다양한 단행본 책으로도 나오길 희망한다. 그것이 또 다른 공연으로 영상으로 변주된다면 지역 스스로 컨텐츠의 소비지가 아니라 당당한 컨텐츠의 주체이자, 생산지로 기능할 것이다. 이것은 풀뿌리 민주주의 초석이자 보루이고 문화 르네상스를 이끄는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스스로 살아온 삶의 터전의 생생한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권력과 자본에 맞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들려주는 것은 공익적이고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은 지역 사회의 공기 같은 구실을 할 것이다. 

또 하나 앞서 말했듯이 언론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전하는 사람이다. 결국 움직거리는 것은 민이다.

언론의 끄트머리에는 언론 그 자체가 권력이 되는 게 아니라 지역 곳곳에 제대로 된 공론장이 하나둘씩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 공론에 의해 언론이 제어되고 민에 의한 공론장, 생활세계에 의한 공론장이 중심이 될 때 뿌리 민주주의는 한 발짝 더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같이 기형적인 비정상적인 1/4이 넘는 인구가 서울에 집중되어 사는 이상한 나라에서 지역 언론과 마을 신문 등 공동체 미디어의 발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체계에서 생활세계의 중심으로, 수직 위계에서 수평적인 연대의 힘으로, 자치와 자급의 힘, 지역 공동체의 힘으로 곳곳에 튼실하게 뿌리내어 이 땅을 송두리째 흔들어낼 수 있는 작은 씨앗이라 생각한다.

변화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건강한 물방울이 하나둘 모여서 물꼬를 트고 물길을 만들어내듯 제대로 된 지역언론을 비롯한 공동체 미디어 등이 갇혀있지 않고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연대의 물길을 만들어낸다면 그 물길은 도랑과 도랑을 잇고 샛강을 지나 강과 바다로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다.

연대 없는 자치, 자족적인 자급은 스스로를 자립이 아닌 고립시켜낼 것이다.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묵직한 것들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우리의 삶을 여전히 핍박하고 억압하며 수탈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하고 싸우며 우리의 토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지역 언론을 생각한다. 다양한 공동체 미디어를 생각한다. 그 본질인 공론장을 다시 생각한다.

*부록 : 마을 신문에 대한 고찰

마을의 공론장이자 마을 사람들의 말의 우물인 마을신문은 물처럼 중요하다.

물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물이 흘러야 깨끗해지는 것처럼 말 역시도 같이 나눠야 하고 돌아야 산다. 진실한 말들이 서로 보듬는 말들이 혈관의 피처럼 줄기차게 흘러댈 때 그렇게 순환될 때 말은 물만큼 중요하다.

그 말을 다루는 마을 신문은 모두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흘러넘쳐야 하고 바로 그들이 말의 수원이기도 하다. 말 뿌랭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제도 언론과 다른 개념이다. 제도 언론은 이미 틀거리가 지워져 있고 직업 기자들이 전문 기자 공부를 하며 들어가서 이미 체계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만 마을신문은 이와는 다른 개념이다. 커뮤니티 저널리즘이라 하듯이 생활세계 속, 지역 공동체의 아래로부터 모아진 말들의 공론장의 개념과 더 가까운 것이다.

제도 언론이 속칭 말하는 여론을 갖고 위에서 주무른다면 마을 신문은 생활 속으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아래에서 공론화하는 실제적인 공론장의 개념과 가깝다.

마을신문 자체를 소소한 미담소식이나 마을 이야기로 제한시켜 생각하는 틀 지우기가 제도 언론이나 체계에서 음험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마을신문 역시 그 한계가 없이 끊임없이 불온해져야 한다. 지역사회나 생활세계에 들어온 체계 권력과 자본의 횡포와 억압에 저항과 투쟁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대변해야 하며 생활세계를 지키려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실려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더 치열하게 우리의 생활과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이자 초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또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상호 소통을 통한 모두가 기록한 역사가 될 것이다.


마을신문이라 해서 한 마을로 한정지을 게 아니다. 우리의 마을은 생활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스로 고립되지 않고 독자적인 자립 생활권을 스스로 가늠하고 마음을 모아내어 마을 신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신문은 문턱이 더 낮춰져 모두가 만드는 마을신문을 지향해야 한다.

모두에서 시작해 모두의 힘으로 진행되고 제어될 때 그 힘은 모두의 일상으로 제대로 스며들어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것처럼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몸에 체화될 것이다. 

말의 흐름을 잡아내는 일, 바른 말을 흘러내게 하는 일.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다.
요즘처럼 반지르르한 말, 세련된 말들이 창궐하고 매끈하고 유려한 말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 전문 용어들이 횡행하고 유창한 말들이 휘황찬란하게 휘감을 때

그렇게 정신 사납게 말들의 잔치에 곁방 늙은이처럼 변방에서 소외되어 사람 모가지 수만 채워질 때 우리의 말은 이미 그들만의 언어로 짓눌려 오염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저잣거리의 말들을 거칠고 살아있는 말들을 끊임없이 끄집어내고 지켜내지 않으면 그것을 모두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말들은 사라지고 움직거리지 못한 채 박제될 것이다.

그 말들이 숨 쉬는 것처럼 모두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거릴 때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말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생명은 꿈틀거린다. 콘크리트 더미에서도 조그만 틈을 비집고서 햇볕을 받고 물을 머금어 생명이 자라난다. 그 틈 새로 더 많은 햇볕과 물들이 스며들고 뿌리가 내리며 가지가 뻗어지면서 얼었던 마음들이 굳어졌던 마음들이 갈라지면서 숨구멍이 비로소 생길 것이다.

말의 돌고 돎은 그런 것이다. 서로의 굳어졌던 마음에 한줄기 햇살을 그리 비추는 것이다. 그래서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꽃을 피웠다고 거기서 끝나면 안 될 것이다. 그들만의 것으로 더 공고해질 때 위험해진다.

더 심연으로 더 변방으로 잔뿌리 하나 까지도 건사하려는 그 마음으로 울타리를 자꾸 만들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연대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밀어야 살아날 수 있다.

더 깊고 더 넓게 같이 더불어 잘 살자는 그 마음으로 소외된 것 하나 없이 공생하자는 그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것이다.

몇몇이 모두를 대변할 때 그들의 헌신은 권력으로 바뀔 수 있고 때론 무거운 책임감으로 변질되어 스스로를 짓누르며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끊임없이 나누고자 할 때 모두의 마음속에서 꽃이 필 것이다. 말이 물처럼 흐를 때 말의 꽃도 그렇게 필 것이다. 마을신문은 말의 수원지이고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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